웹과 가독성(1) _ 명조와 고딕

가독성이란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요인(readability)과 얼마나 읽기 쉽게 조판되었는가 하는 요인(legibility), 양쪽을 모두 아우르는 말입니다. 디자인을 광의로 이해한다면 양쪽을 모두 포괄하겠으나, 보통 디자인에서 이야기하는 가독성이란 후자를 가리킵니다. 이 글도 역시 그렇습니다.

글자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산세리프(고딕)와 세리프(명조)의 해묵은 논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인쇄매체에서는 명조가, 웹에서는 고딕이 가독성이 높다’는 설이 퍼져있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현재로선 가독성에 있어 명조와 고딕 모두 정량화하기 힘든 장단점이 있는데다가 납득할만한 수준의 연구결과가 나온 것도 아닙니다. 디자이너의 취향 문제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웹에서는 고딕이 보기 좋던데…

가독성이라는 것이 매체와 같은 환경적 요인에 의해 크게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웹에서 고딕이 가독성이 높다’는 말이 나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명조는 획 자체에서도 변화가 있고 획의 끝에서 그 변화가 절정 – 이것을 세리프라고 부릅니다 – 에 이릅니다. 고딕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 것이죠. 디스플레이의 해상도가 낮으면 이 획의 흐름들은 흐리게 보이거나 오히려 두껍게 강조됩니다(글꼴의 크기가 작으면, 산세리프가 더 유리하다고 하는 이론적 근거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래저래 거칠게 표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사용자의 가독성은 크게 떨어지죠.

여기에 한글의 특수성이 더해집니다. 영어의 경우 26개의 문자를 만들고 여기에 숫자와 문장부호를 조금 얹어주면 훌륭한 한 벌의 글꼴이 완성됩니다. 그러나 한글의 완성형 글꼴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려 11,172개의 문자가 필요합니다. 물론 탈네모꼴의 조합형 글꼴이 있긴 하지만 완성형의 가독성을 따라가기는 힘듭니다. 영문 글꼴에 비해 한글 글꼴 수가 턱없이 부족한 건 그 때문입니다. 당연히 영어에 비해 수가 적은 한글 글꼴 중에, 완성도 높은 명조 글꼴은 더욱 희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지금은 명조가 더 나은가요?

디스플레이가 좋다면, 웹에서 명조가 고딕에 비해 가독성이 좋을까요? 실제로 웹이라는 환경에서 본문이 명조일 때 가독성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기는 합니다1MacLean, 1980; Rubinstein, 1988. 그리고 명조체의 손을 들어주는 국내의 연구도 많습니다2안상수, 1980; 황진희, 1982. 명조가 가독성이 높다는 주장의 이론적 근거를 몇가지 꼽자면 이렇습니다.

  • 세리프가 수평 방향으로 눈의 흐름을 안내해서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 세리프가 없으면 지루하고, 피로가 생기기 쉽습니다.
  • 독자들에게 명조가 친숙합니다(신문이나 교과서를 떠올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눈은 수평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시각적 고정visual fixation3무언가를 읽을 때 초점을 맞추기 위해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보통 0.25초가 걸립니다.과 단속성 안구 이동saccadic movement4망막에 상이 등록 되는데, 1초에 4회 이상 반복되어야 뇌가 인식합니다. 독서 속도가 느린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망막에 맺힌 상이 사라져 읽었던 것을 다시 읽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읽게 됩니다. 이런 과정들을 생각해 봤을때, 세리프의 장점은 그렇게 인상적이지 못합니다. 안타깝게도 개발자들과 이런 연구자들과의 정보 교류가 활발할거라 기대하긴 힘듭니다. 그래서인지 아직 그런 세리프의 장점을 믿는 사람들은 많은 듯 합니다.

피로에 대한 측정도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Reynolds는 글에서 ‘객관적인 측정법이 고안되지 않았고, 피로에 대한 주관적 평가는 실험 상황과 관련이 없을 수 있는 많은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국내 논문들에서도 마지막 문단에서 피로도 측정은 해당 연구의 제한점이라고 언급하는 글들이 많습니다.

독자들에게 명조가 친숙하다는 것은 받아들일만한 근거입니다. 실제로 인쇄물들은 여전히 명조체를 선호합니다. 많이 본 것에 친숙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최근 연구에서는 고딕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로 반박이 가능합니다5Bernard et al., 2000-2001.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디스플레이상에서 고딕을 많이 접하고 더 친숙해진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글꼴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서 웹에 있는 글들과 논문들을 찾아봤을 때 아쉬웠던 점은 확실히 국내에서 가독성과 글자꼴에 대한 연구는 그 수가 적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문들을 읽을 때마다 항상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실험 재료로 어떤 글꼴을 사용했는지, 실험 대상은 누구를 택했는지, 그리고 실험자가 원래 가지고 있던 입장을 결론으로 이끌어내려 무리하지 않았는지,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맥락에서 연구결과들의 객관성은 사실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단적인 예로 개발자들은 각 명조체마다 자간, 장평, 행간, 행송 등 수많은 실험 사이에서 가장 디자인적으로 뛰어난 규칙을 찾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떤 폰트가 명조체를 대표하고 고딕체를 대표하는지에 따라 피험자가 받을 인상은 당연히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논란이 계속 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연구와 실험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꼴의 미적인 부분은 온전히 디자이너에게 달려 있을지 모르지만 가독성에 대한 연구는 반드시 디자이너와 연구자가 협업을 해야합니다. 가독성은 연구와 실험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해야 하고, 변인이 되는 글자꼴의 세세한 부분을 디자이너 없이 통제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고딕과 명조 중 어느 것의 손을 들어주기에는 이릅니다.

(객관적이지 않은) 주관적인 사족

인쇄매체는 명조, 웹은 고딕이라는 일반적인 고정관념과 달리 가독성은 글자크기, 글줄의 길이, 글자 획의 굵기, 사용자의 기기 그리고 글자꼴에 대한 친숙도 등에 큰 영향을 받고 글꼴이 명조이냐 고딕이냐 하는 것은 그리 유의미한 차이를 낳지 않는다는 연구도 있습니다6권미영, 1993; 박정현, 2016. 저 역시 이러한 의견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명조에 있고 고딕에 없는 세리프가 가독성에 영향을 줄 수는 있으나, 그 영향력이 너무나 주변적이어서 사실 측정할 가치가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웹에서 가독성에 대한 글을 검색해 봤을 때 의외로 고딕이냐 명조냐에 대한 질문에 확답을 내리는 글들이 많습니다. 글꼴에 대해서 짧지 않은 글을 쓴 이유는 그러한 글들을 조심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현재로선 정답이 없기 때문에 세리프의 유무보다는 여러분이 조정하는 0.01rem이 가독성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큽니다. 최대한 많은 글꼴을 검토하고 적용하고 개선하시기 바랍니다.

이메일 주소를 발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